한홍기 (64 국문학과)
나는 차를 운전한 지 50년이 돼가는 것 같다. 한국에 차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좀 일찍 배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침 집 앞에 당시 신진 자동차 학원이 있었는데 친구가 조교로 있어 배우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 호기심에 들렸다가 내 소유의 차도 없지만 그냥 배워 면허증을 받았다. 그 후 중동에서 돌아 온후 여유가 있어 포니 2를 구입하여 회사로 출퇴근을 하였는데 그래도 아마 자가용 출퇴근자는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운전은 감각으로 한다. 그 감각이 몸에 와닿는 나의 경우는 그 기간이 십년이 지나지 않나 생각된다. 그전에는 아무래도 운전대를 잡으면 알 수 없는 가벼운 흥분으로 운전하였다. 특히 3년 차 되면은 앞 지르기도 하고 갖은 곡예를 부리고 싶어 젊은이 다운 난폭 운전도 해 실력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럴 경우는 종착지에 도달하면 가슴의 울렁증이 채 사라 지지 않을 경우도 있다.
차는 내차를 위한 방어 운전도 중요하지만 좀 노련해지면 나보다 남의 차를 먼저 보호해 주는 운전 습관이 중요하다. 행인은 물론이다. 그러려면 차 주위의 모든 상황을 인식하면서 주행을 하면 좋다. 나는 과거 중동에서 매일 아침마다 장거리 출장을 자주 나가는 백여 대의 트레일러와 덤프트럭 운전기사에게 안전 운전에 대해 연단에서 의무적으로 잔소리를 하고는 했다. 매일 같은 내용이라 초짜인 내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지겨워, 하루는 나이 지긋한 노련한 트레일러 기사에게 나 자신도 배울 겸 자문을 구했다.
그에 의하면 운전 방법은 항상 안전 거리 확보하면서 전방 1킬로를 본 후 후방 1킬로를 보고, 다음에 좌우 사이드 미러를 본다. 그러나 차선 변경은 반드시 옆 창문을 통해 들어간다. 물론 이 순서는 쉼 없이 계속 운전하는 도중에 자동적로 하면 나의 차는 물론 남의 차도 방어를 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를 잠깐 내려다보면 차는 벌써 30미터는 나간 후라고 한다.
이 감각을 익히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던 것 같다. 이제는 과속을 하면서도 모든게 한눈에 들어와 여유가 있고 한산한 좁은 골목에서도 습관이 돼었다. 우선 좋은 게 미국에서는 뒤에 따라오거나 아직도 잠복해 있는 교통 아저씨가 있어 효과를 볼 때가 많다. 한번 걸리면 시카고는 기본이 100불인데 캘리포니아는 300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급발진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서울 시청 사고로 한국에서는 몸살을 앓고 있는데 미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워낙 현대 기아차가 거의 굴러다니니 사고율도 자연스럽게 높다. 반면에 미국은 다양하다.
사고 원인에 대한 논쟁은 각 나라별로 끊임이 없는데 한국은 피해자가 증명을 하여야 하는 반면, 미국은 제조 업체가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은 한 푼의 보상도 못 받는 반면 미국은 보상을 두둑이 챙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미국 제조사가 완벽한 증거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소송 도중 적당한 합의금으로 끝낸다. 피해자도 좋고 제조사도 더 이상 판매에 먹칠을 안 당해 좋다. 미국에서 단 한번 토요다 차에서 브레이크로 충돌 사고가 발생해 차를 전부 리콜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브레이크 문제가 아니라 차량 설계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해 주식은 개판이었지만 지금은 오르막이다.
급발진의 쟁점은 요즘 자동차가 거의 컴퓨터 전자화가 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젊었던 시절은 모두 기계식으로 되어 기어를 놀리는 손과 발놀림도 바빴다. 사고가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지만 급발진은 없었고 요즘 시대의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하였다.
분쟁의 요지는 브레이크 작동인데 제조사는 이에 자신만만 한 표정이고 한치도 물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브레이크는 전자식이 아니고 기계식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옛날 같은 단순 무식한 방법을 고수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오만가지 전자가 들어가 있는 다른 부품들에 들이대냐다. 생각하면 브레이크는 가장 단순한 작동으로 그냥 누르기만 하면 유압이 저절로 들어 가는데 굳이 복잡하게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고 요즘 같은 인공 세상에는 뛰어다니는 개도 갑자기 정지하는 세상이니 좀 더 까봐야겠다.
나의 경우는 과거 오래전 브레이크 오일이 다 빠져나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뒷골이 서늘한 경우가 있었으나 제동 거리가 좀 더 늘어나서 그렇지 사고는 없었다. 그나마 요즘은 오일을 오랫동안 채우지 않아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제조사는 피해자가 백 프로 가속 페달을 눌렀다고 한사코 우긴다. 더구나 나 같은 늙은이는 혼동할 가능성이 많으며 실제 통계도 그렇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하도 컴퓨터화한 세상이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페달만 비추는 비디오가 있다는데 발 근처에 장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한국식으로 늙은이들은 운전면허를 반납하면 소정의 금액을 준다는 좋은 제도가 있다는데 미국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꿈도 못 꿀일이다. 내가 서울 시장이라면 아예 운전면허 없는 젊은이에게는 시에서 돈도 많겠다 미리 1억씩 주고 10년 후에 운전면허를 따겠다면 그때 5천만 원은 반납하라고 하면 자동차도 운전자도 확 줄어드는 일타쌍피가 될것이다. 사실 한국은 이제 교통이 세계에서 가장 잘 발달되어 차가 필요 없다. 아이 여러명 낳고 차가 없으면 집도 주겠다 기본 소득이 솔솔하다.
요즘 인기 있는 유투브를 보니 급발진시 3가지를 시도해 보라고 한다. 우선 브레이크를 힘껏 누르는데 간간히 하지 말고 한발 아닌 두 발로 죽어라고 끝까지 눌러야 한다. 그리고 기어를 중립에 넣고 시동을 끄는데 길게 한 번만 누르지 말고 최소 3번 이상은 순식간에 눌러야 한다. 그래도 차는 안 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가드레일이거나 축대에 옆으로 부딪쳐 속도를 줄인다. 만약에 가드레일 없으면 남의 차 뒷 트렁크를 그냥 박으라고 한다. 뒤 트렁크는 공간이 있어 충격이 완화된다고 하며 전봇대 같은 것을 정면으로 부딪치면 에어백도 안 터지고 즉사한다고 한다. 기억하기 힘든 사람은 차 안에 붙여 놓기 바란다. 막상 볼 새도 없겠지만 여러 가지로 참 으스스한 세상이다.
(July 2024)
관용과 배려
한홍기 (64 국문학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MBTI가 유행인 모양이다. 이를 기준으로 자기 성격과 적성을 알아 진로를 개척하거나 혹은 상대 배우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60년 전 미국에서 심리학자인 모녀(母女)가 4가지 기준 성격을 통해 16가지의 유형을 만들었다는데 한국에서는 최근 정치계에서까지 회자되는 단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외향성과 내향성 외에 여러 가지를 섞어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으며 더욱 그 16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내 것인지는 더욱 모르겠다. 따라서 점성술보다 못한 엉터리 이론이라고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은 모양이나 흥미 있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더욱이 요즘 강남 복술가와 무당굿도 부활된 한국에서는 이 자료가 젊은이들 눈에 안 뜨일 리가 없다.
사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본인이 자신의 성격을 알아도 상대방이 보기에는 달리 보이는 게 흔하다. 젊었을 적에는 마치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 속에 하얀 구름이 지나 가는 격으로,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별자리와 맞춰진 그 지점이 나의 오늘 아침 심리 상태라면, 저녁 심리 상태는 그 옆으로 살짝 움직인 흰 구름과 같다. 젊은 아가씨일수록 더하다. 그러나 늙어 갈수록 흰구름은 더욱 서서히 움직이며 완전 꼰대가 되어서는 붙박이로 정지해 있다. 그렇다고 그 위에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용과 배려다. 이 지구의 지구인들이라는 인간의 성격은 과거 몇천 년 동안 역사적으로 폭력과 전쟁의 날로 생애를 보냈다. 요즘도 자기 국가적이고 지역 안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안 보인다. 그리고 보면 정치는 폭력과 투쟁이 본질이다. 총기로 뒤덮인 미국에서 어제 대통령 유세 중에 일어난 사건만 봐도 그렇다. 어느 철학자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정치학 개론은 개똥이 무색해질 정도가 됐다.
아마 이를 보다 못한 종교가 이 고리를 아주 순화시키려 탄생했는지 모르겠으나 스님과 장노님이 많은들 무엇하겠는가. 인간의 기본 자체에 배려와 관용이라는 DNA가 없어서이다. 야생 동물의 하나였던 원시인이 조금 순화되어 두뇌가 발달되었을 뿐 기본 염색체는 변함없다. 종교계 싸움도 심화되었고 신들의 세계도 제 각각이다. 이 염색체 위에 별과 흰 구름이 돌아다녀봤자 정말 뜬구름이다.
하나님께서 왜 순한 양과 목동을 등장시켰는가. 혹시 창조하실 때 관용과 배려라는 염색체를 넣는다는 것을 실수로 잊어버려 양의 염색체를 통해 지금이라도 목동이라는 목사님을 시켜 육체 수술은 시킬 수 없으니 마음이라도 그렇게 가지라고 성격 개조를 시키는 사역(使役)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은 살생치 말고 결국은 불꽃 장작개비로 돌아가니 항심(恒心)을 갖되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고 설파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달마(逹磨)가 동쪽을 넘어 한국까지 와 이를 열심히 전파한 면벽의 깨달음은 결국 이에 근거한 것 일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개인적으로 보면 나 자신은 관용과 배려는 전혀 없었는지 의심이 간다. 어쩌면 억울한 면도 있다. 내 딴에는 몇 번의 진면목을 유지한 적이 있었는데 모두 원래 저런 인간이 아니었다는 표정이다. 괜히 나만 손해 본 느낌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본성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관용과 배려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대성 원리인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차라리 이를 핵폭탄으로 발명하였다면 그 수많은 살생은 없었으며 지금 이 지구는 웃음꽃 바다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모어(Humor)는 관용과 배려를 갖는 전초 단계다. 그러나 이것도 상대성일 뿐이다. 기껏 유모어를 했는데 웃기는커녕 멍멍한 사람이 있는 반면 간혹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멍멍한 건 그렇다 하지만, 뇌 회전 불량으로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급발진되기 전에 2차 유모어를 밟아 급정지시킬 수밖에 없다. 얼마나 부글부글한 일 아닌가. 그래서 MBTI는 나에게는 별로다.
미국에는 육법전서 두께만 한 Slang Dictory라는 은어 사전이 있다. 아마 이 정도는 알아야 영국이 아닌 완벽한 미국말을 할 정도다. 막말로 세계 온잡종의 말을 용광로에 끓였으니 흘러나오는 말이 Slang이 안 될 수 없다.
미국에는 한때 스탠딩 코미디로 미국을 달군 마가릿 조 (Margaret Cho)라는 여자가 있다. 지금은 50대 중반이 되었으려나 영어를 못하는 나도 TV를 보면 음정과 표정만 봐도 뒤집어진다. 공영 TV에 한때 시트콤으로 계속 나올 정도이니 남녀노소 인간 따질 것 없이 그들에게 온통 BTS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한인 1.5세인데 아마 Slang 사전 1장부터 막장까지 모두 아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모어가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럴수록 유모어를 갈구한다. 관용과 배려는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만이 사회뿐 아니라 세계를 구하는 구세주이다. 막장을 친 지구 앞에는 더욱 그렇다.
(July 2024)
한홍기 (64 국문학과)
철학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삶의 가치는 어디서 느낄까. 종교 철학에서는 사후에 신에 귀속됨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안다고 한다. 생전의 삶은 마른 장작과 같은 건성(乾性)이다. 불에 타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진정한 생전의 삶은 철학이 먼저 나가고 인문학이 뒤따르며 다음에 과학이 뒤따른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분법적인 삶이다. 그래서 두 개의 삶의 조화가 본질적 근본 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완벽한 삶은 없다. 노력할 뿐이다.
지난 2월 한국의 고려대학교 졸업식에는 세계 최초로 테스형도 감당 못할 분이 등장하였다. 비록 학사 학위이지만 그 가치는 신의 경지에 이르는 철학자 탄생이었다. 70대 중반 나이에 한국으로 들어가 52년 만에 학교에 다시 입학해 졸업을 한 미국에 사는 변문수 씨다. 20대 초반 68년도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1학기 재학 중 가족이 남미로 이민 가는 바람에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뒤따라 갔다가 그 후 시카고에 73년도에 어렵게 정착해 살아왔다. 초기 이민자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밑바닥 고생을 많이 하였으며 후에 보험회사에 들어가 32년 동안 일을 하다 은퇴를 하였다. 한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그러던 중 일찍이 시카고에서 만나 지극히 사랑하던 아내가 갑자기 뇌암으로 쓰러져 병간호를 오래 하였으나 6년 전 저 세상으로 안타깝게 이별을 하자 인생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해 다시 삶의 본질을 찾기 시작했다.
인간은 70대를 넘어가는 나이며는 인생을 서서히 준비하는 나이다. 그 좋던 젊은 기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진정으로 뒤를 돌아다보며 자연스레 아쉬웠던 지나간 일을 되짚어 본다. 그래서 개중에는 평소 죄 많던 생을 사면(赦免) 받으러 안 나가던 교회와 사찰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정말 신이라는 분은 계시나 갈날에 대해 걱정한다.
늦게 배움을 찾아 학교를 찾아가는 만학은 보통 경지의 사람이 아니면 힘들다. 생전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몰라 한이 맺혀 한글을 깨우치기 위해 가는 경우는 있어도 못다한 학문을 머리가 굳었을 때 완성하러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도 70대 중반에 20대 풋 젊은 학생들 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다. 딱 아들 딸 같은 교수가 교단에 나와 가르치는데 나 같으면 글자가 어지러워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달콤한 소리라며 더욱이 손자뻘 학생들과 서예 동아리까지 같이 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고자 한잔하러 서슴없이 동행하였다니 정말 철학적인 심성이 없었다면 못 할 일이다. 고려대학교에서는 물론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는 최초의 일이라며 언론에서 격려가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대답한다.
변문수 씨는 오래된 교회의 유명한 장노이기도 하다. 삶의 근본이 다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심지가 낮아 평소에도 봉사를 하기보다 누가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불평불만이 많고 범사에 지는 것을 싫어한다. 일단 그냥 우기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를 따라 나도 이제 무언가를 해 볼까 하는 모범적인 생각이 잠깐 스쳤으나 이제는 완전히 기력도 소진되고 치매가 벌써와 그마저 그 기회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진정 삶의 가치는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의 곁에 오래 사귄 그와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나 그보다 그에게 말년의 행복은 학문적 완성도 중요하지만 엄마를 보내 놓고 우울에 빠진 아버지를 한국으로 보내 만학을 추천하고 지원해 준 두 딸과 네 명의 손자에 있다. 감히 간섭할 수 있다면 그 딸들과 손자들은 벌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로서의 존재"를 기반한 형이상학적인 삶의 그림을 어려서부터 이어받아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철학은 인생의 기본이다. 머릿속에 철학이 없으면 분뇨 덩어리 일 뿐이다.
(June 2024)
한홍기 (64 국문학과)
미국은 도시 주변에 자연공원이 많아 그런지 야생 산 나물이 많다. 뉴욕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삼림에 둘러 싸여 있기도 하지만 특히 시카고는 150년전 도시 전체가 화재로 전부 타 새로 도시 건설을 해 도심에도 큰 공원이 많다. 처음부터 설계를 할 적에 공원을 먼저 곳곳에 널찍하게 집어넣고 소방서도 화재를 경험 삼아 촘촘하게 자리를 잡았다.
다운타운 공원은 뉴욕 센트랄 공원의 서너 배는 될 정도이고 북쪽으로 미시간 호수를 따라가며는 골프장과 해수욕장, 요트 계류장을 포함한 공원이 끝이 없다. 그리고 동네 곳곳에는 아무리 작아도 축구장 만한 공원은 있다. 조금 바깥 도시로 나가면 작은 강을 따라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위스콘신주까지 이어진 커다란 숲이 있으며 사슴을 비롯한 야생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여기에는 고사리, 냉이, 산마늘, 쑥 같은 자연 나물들이 많이 자라 한국 교포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농작물을 좋아해 집에 텃밭을 가지고 있다. 상추, 깻잎, 고추는 기본이고 고구마 오이도 여유가 있으면 재배한다. 반면 미국인들은 봄이면 꽃밭을 가꾸느라 부산한데 한국인들은 그보다는 텃밭이다.
그러나 텃밭에서 구하기 힘든 고사리 산마늘 같은 것은 숲 속에서 채취를 한다. 특히 이른 봄 뜯기 시작하는 냉잇국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인기가 대단하다. 산마늘 역시 번식력이 좋아 숲 속에 일반 풀같이 널려 있기도 하고 심지어 골프장에서 발견될 때도 있다. 산마늘 김치는 봄부터 여름내 기운을 돋우는 강정제 같은 존재다.
그중 인기가 많은 것은 고사리다. 눈과 비가 많은 미국 중부 지역이 LA 같은 서부 지역산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투실하다. 과거 이민 초기에는 자루로 뜯어 장에 내다 팔기도 해 노인네들 손주 용돈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사리가 들어간 모듬 나물범벅 비빔밥이야 어찌 표현 할지 모르겠다.
그에 더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역시 산삼이다. 시카고 밖으로 나가면 그래도 강을 낀 작은 산들이 보이는데 수천 년 인디언들이 살아 왔던데라 그런가 산삼이 그런대로 있는 편이다. 인디언들은 태초에 몽골인들이 시베리아를 거쳐 알래스카를 통해 왔다는 게 정설이다. 특히 남쪽 지방 체로키족이 오랫동안 거주한 테네시주의 스모키 마운틴에는 산삼을 캐러 가는 애틀란타를 비롯한 우리 교포들이 많다. 그곳에서는 고급 테킬라 병에 뿌리를 넣어 고가로 판매하기도 하는데 오래전 딸내미가 한병 보내와 몸보신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나는 전부 생략하고 그냥 뿌리부터 이파리채 생으로 먹는 게 최고였던 것 같다. 한국의 천종삼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비교할 필요 없이 산삼잎은 확실하니까 여기는 무더기로 뜯어왔길래 그냥 물에 씻어 생식을 하고 이파리는 상추 싸 먹듯 밥에 싸 먹는다.
인삼은 이제 위스콘신주에서 대단위로 농사를 짓는다. 해를 가린 검은 그늘막이 뒤덮인 농지는 산기슭에 여의도 반만 한 데가 여러 군데 보이고 이제는 주정부에서 장려해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대부분 중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재배한다. 주로 중국과 한국에 수출하며 미국의 제약회사에 판매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삼을 제외한 산속에서 나오는 야생 식물 채취는 이제는 단속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대부분 한국 할머니들이 운동 삼아 숲 속을 거닐며 뜯은 것이 소문이나 너도 나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산림국에서 대단치 않게 보았다가 인원이 늘어나자 무언가 아니구나 싶어 단속을 시작했다. 이제는 경고장을 넘어 벌금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액수가 점점 올라간다.
미국 공원 관리국의 삼림 보호 활동은 대단하다. 많은 예산을 들여 각종 야생 동물과 물고기 그리고 화재를 관리하며 직원들도 많다. 그리고 요즈음은 인공위성을 통해 감시를 하는데 이제는 할머니들이 이를 모르고 야생 식물을 채취하다 재수 없으면 갑자기 나타난 기마대에 질겁을 하기도 한다. 죄명은 "동물이 먹는 걸 왜 뜯어 가냐는 것"이다. 그들도 몸뻬 입은 한국 아줌마, 아니 할머니는 못 말린다고 한다.
그나저나 하여튼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산마늘을 갖고 왔는데 이번 여름이 되면 집사람 일행들이 오랜만에 산삼을 캐러 가겠다는데 간섭할 수도 없고 갖고 오면 나는 모른 척하고 주워 먹을 수밖에 없다. 다만 집사람은 오래전 다리를 수술해 올라갈 수는 없고 밑에서 망보는 역할 분담이라고 해 조금 안심은 된다.
시카고는 山海眞味는 없어도 山草眞味는 있다.
(June 2024)
한홍기 (64 국문학과)
사진은 6·70년대의 청계천 사진이다. 다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불과 50년 전인 이 당시의 모습은 현실이다. 60년대는 나의 학창 시절인데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엄청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상상이 가질 않을 정도의 가난이었다. 아마 이 시기가 오천 년 역사상 가장 가난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현대 무기로 가득한 한국전이 끝난 여파였다.
과거 여러 왜란과 호란이 있었지만 산에 나무뿌리 하나 없이 완전히 헐벗을 만큼 동서양이 치열하게 격돌한 전쟁으로 300만 명이 죽었으며 천만명이 부상당하였다. 고아원은 넘쳐났으며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미국에서 원조해 준 옥수수 전분과 분유를 점심때 학교 운동장에서 드럼통에 죽으로 끓여줘 줄을 서가며 얻어먹으며 자랐다
우리는 그 후 정신없이 지나간 경제 성장과 과학의 빠른 발전으로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 오늘에 이르러 기억하는 사람이 드믈다.
그러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재난이 또다시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갑자기 이룩된 경제는 모래성과 같아 국민 행복 지수와는 관계가 없다. 한반도는 다시 한번 전란에 휩쓸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이스라엘보다는 현명한 스위스 같은 중립국이 될 수 있다면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어 또 한 번 초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
이태리 로마에 오늘도 가면 시청 앞 큰 광장에 로마제국 시대 유럽을 전부 차지한 커다란 하얀 벽화가 오만하게 버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고풍이 있는 부유한 취리히에 가면 과거 주위 국가에 하두 휘둘려 몇백 년 동안 시달린 처참한 과거를 그린 벽화가 명화다. 지금은 주위 국가의 4개 국어가 공용어다.
그것이 안 보인다면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 박물관에 가면 무엇을 보고 나오는가? 모나리자의 알듯 말듯한 미소만 보는가. 스페인 내전으로 처참히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장면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많은 관람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면 반 고흐의 공포에 질린 자화상은 정신 공황이 와 멋대로 그린 것일까? 시대적 반영이 혹시 얼굴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파리 한쪽 구석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고민이 있어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가. 그렇다면 프랑스의 가난한 농부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은 무에 그리 평온한가. 바구니에는 실제 감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아 시체는 아니었나. 돈 몇 푼에 팔려 감자로 덧칠해 루브르까지 깜짝 속인 이유는 무엇인가. 전부 과거 몇백 년의 살육적인 전쟁의 후유증이 아니었나는 나의 오해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 한국 뉴스를 보니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서울에 달을 띄워 여의도 상공에서 기구 놀이를 하고 한강 물 위에 몇천 명 들어가는 뷔페집을 만들겠다고 부산하다. 시장의 업적이 부족해서란다. 차라리 시청 광장에 시장 나리가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을 만들고 덕수궁 돌담에 그 보다 높은 장벽을 만들어 과거 시청 앞으로 흘렀던 50년 전 청계천 벽화를 그려 놓는 것이 서울의 달보다는 멋있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 급이라면 그 벽화 속에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이 참에 일본까지 싸잡아 그들의 전쟁 때문이라는 것을 소리치며 통곡의 벽으로 성지를 만들 만한 뱃장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듯한 우물안 개구리보다 좀더 대륙적이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을 쫓아간다면서 어찌 다 흥청망청한 뉴욕을 선망의 대상으로만 삼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시카고는 시내에 그 흔한 전광판도 하나 안 보이고 30년 동안 카지노가 못 들어오게 격돌하게 싸워 오다가 이번에 처음 어쩔 수 없이 하나가 들어왔다. 그러나 다음번 시장 선거에 카지노 부작용이 나타나면 장담을 못한다. 겨울에 눈도 하나 제때에 못 치워 시장 모가지도 서슴없이 자른다.
시카고의 달이라면 미국 귀신도 씨나락 까먹냐고 극장 무대에 등장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과거 남북전쟁과 한국전에 관련하여 동상을 하나 더 만들자면 많은 기부금이 아직도 쏟아진다. 반면 한국에서 백선엽 장군 동상 하나 서울 어느 한구석에라도 세우자고 하면 맞아 죽을 딱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의 아버지도 장군도 없다. 물론 비록 전쟁에는 패하였으나 조선 시대 전란시에 장군 한 명쯤은 있었다.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렇게 씌어있다.
유럽은 골목마다 동상인데 서울은 골목마다 먹자다. 이제는 퓨전 스타일이다. 지금은 돈을 열심히 벌어 스트레스 때문에 먹고 놀 바쁜 시기다. 외제 고급차로 시속 200키로 정도로 오밤중에 경주하는 것은 여가일 뿐이다. 윤리 도덕 교과서는 아예 없었고 꼰대만 있을 뿐이다. 통일은 나중에 돈 더 퍼주고 평화적으로 하면 되지 복잡할 필요가 없다. 우리 민족은 원래 고구려 때부터 지고지순하지 않았나. 다행히 신문 방송의 낭만을 따라갔을 뿐이고 한술 더 떠 케세라 세라를 더욱 좋아한다.
중국 단동에 가면 끊어진 압록강 철교가 아직 그대로 있다. 한국도 어디 전쟁의 상흔이 한 군데는 있다고 하지만 뉴스에도 잘 안 보이고 관심도 없고 오히려 다들 단동에 가서 피부로 느끼고 온다. 나는 싯누런 동판이 어떻게 그리 싱싱한지 전율까지 느꼈다.
서울역 옛 건물은 아직 그대로 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일본 놈들이 지었으니 다 때려 부수자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낼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한국은 통일이 언제인가는 될 것이다. 그것이 연방이든 통합이든 그 순간 국호흘 바꾸며 중립을 공표하는 노력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통일은 한반도에서 핵폭탄과 경제력의 융합으로 무시 못할 한 마리의 용이 다시 태어나 통일이 요원할 수 있으나 중립은 오히려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미국 군대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트럼프가 좋아하는 주둔 비용 없애서 좋고, 중국과 러시아도 앓던이 빠져 좋다고 할 것이다. 북한 김정은이야 원래 스위스 출신 아닌가.
이제 그만큼 벌으셨다면 서울의 달도 좋지만 스위스의 달을 띄우기를 바란다. 국민들 몸 닳게 하고 정신 건강에 좋은 건 그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 또 몇 천년을 그들의 등살에 살 것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듯 세계 벌판에서 진정한 한반도 독립을 외치는 젊은 혁명아가 나오기 바란다.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화살로 맞추었다는 윌리암 텔은 실화의 인물이다. 그런 치욕까지 당하며 오랫동안 피나게 싸운 스위스 독립 투쟁의 아버지다.
인도의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이라고 부른 한반도에서는 누가 그 화살로 사과를 맞힐 것인가. 나의 망령스러운 꿈같은 이야기가 犬聲이 될 망정 거품이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거품이면 어떤가. 대한 독립 만세다.
(May 2024)
노인과 수출
한홍기 (64 국문)
오늘은 63번째 맞는 516이다. 한국의 부흥은 1961년 516과 함께 왔다. 그날 아침은 아주 조용했다. 직장 출퇴근이나 학교 등하교 시간도 변동이 없었으며 정상적인 날이었다. 다만 라디오 방송만이 같은 내용이 나오고 다 낡은 시청 건물 앞에 한 무리의 군인들만 서성일뿐 거리는 그렇게 삼엄한 분위기도 없었다. 그냥 몇 대의 승합차와 꼬마 전차(電車)가 늘 복개도 안 돼 청계전 분뇨 악취가 나고 그위에 줄이은 판자집을 따라 비포장 길을 가끔 지나갈 뿐 평범한 날이었다.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옛 일본인들이 지은 반도 호텔에서 잠을 자던 장면 정부는 그 전날 밤중에 겁을 먹었는지 모두 소리 없이 도망간 후 며칠을 두고 나타나지 않아 전 세계에 유례없는 무혈 정권 교체가 자동차 경적 소리 하나 없이 싱겁게 끝났다. 천만 다행히 북한 패거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아마 김일성이가 땅을 치고 가장 후회한 날이었을 것이다.
무슨 혁명이네 쿠데타네 하는 소리는 박정희가 죽은 후 한참 나중에 나온 정치 호사꾼들과 논객이라는 사람들의 소리이고 그날 아침은 그저 그랬다.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백 년 후 백성들의 몫이기도 아닌가 생각한다.
원래 천성이 순한 백성은 군소리 없이 그런 갚다 하고 그날도 그렇게 따라만 갔다. 그러나 몇 해 전 일어난 419 때는 곡괭이와 쟁기를 들고뛰어 나가 며칠 동안 피를 흘렸지만 이날은 웬일인지 소 닭 보듯 멍청하다.
아마 첫마디가 그동안 지독히 못 살았으니 특이하게도 "잘 살아보자"가 마음에 들었나 보고, 엊그제 625를 겪었는데 그 지긋지긋한 공산당 때려잡자는 소리도 공감이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장에서 삥을 뜯었던 놈들을 전부 조리돌림하고 사형까지 시켰으니 서민들에게야 그냥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후 1964년 베트남 전쟁에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군인들을 과감하게 해외로 대거 파병하여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 원조를 이끌어 냈으며 다음해 일본과 국교를 맺어 본격적인 수출의 물고를 텃다. 그리고는 가발을 해외에 팔겠으니 동네 처녀들은 머리 들고 나와 팔라고 소리꾼이 엿장수 마냥 가위를 들고 골목을 다녔다. 값도 후하게 쳐줘 아줌마까지 나섰다. 그렇게 바다 생선이고 광산 돌멩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갑자기 산사태가 나듯 죄다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 말 많던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야당의 거센 반대에도 박정희의 의지로 개통 된 후 이제는 물건을 만들어 팔자해서 원단과 재봉틀까지 서울 구로동에서 일본서 빌려와 옷을 만들고 장갑이고 숟가락이고 자식새끼 빼놓고 닥치는 대로 만들어 순전히 인건비만 남는 경공업 제품을 처음으로 내다 팔기 시작헀다. 전국민이 공순이 공돌이가 되었고 수출의 날까지 만들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니 이제는 간이 커져 배도 팔고 자동차도 팔아 보겠다고 바다를 메꿔 중화학 공장을 오랫동안 짓기 시작하더니 한발 더 나가 사람도 팔아 그 뜨거운 불가마 속 중동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아니 내몬 게 아니라 뜨거운 들 어떠하랴 이 한 몸 바쳐 돈만 벌 수 있다니 자진해서 다들 뛰어 나갔다.
이 당시에는 눈이 멀어 악밖에 안 남았다. 게다가 민간이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알 껍질을 깨고 바다 건너 세상 구경을 처음으로 할 수 있다니 뜨거운들 얼마나 뜨거워라였다. 나도 그 와중에 휩쓸려 물건도 팔아보고 몸도 팔았다. 직접 내손으로 팔아 선적한 물건을 헤아려 보니 망둥어 아귀부터 자동차 기차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나는 1971년 대학졸업 후 몇 군데의 중학교에서 교사 제의가 있었으나 봄가을 교생 실습 때 나는 적성이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단에 서면 순진한 눈망울에 왠지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나 마침 카투사 경력이 있어 영어회화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는데 당시는 영문보다 생활 영어가 필요한 시대였으며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군소 무역 업체가 많이 태동하는 시기로 취직을 하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사실상 정부는 1972년부터 보다 체계적인 무역업을 위해 법령을 새로 제정하고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그해부터 경영대학원에 의뢰해 무역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역사가 없으면 무역업 허가를 내어 주지 않았다. 나도 이 시기에 공부해 상공부로부터 초기 단계의 빠른 번호로 국가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그 후 정부는 1976년도에 종합상사법을 마련해 일본 형태의 종합상사를 설립하고자 1977년도부터 현대와 삼성에서 신입과 경력직원을 먼저 뽑기 시작했다. 그룹사의 모든 제품과 여타 군소업체에게 수출을 자금 지원을 포함해 전문적으로 대행해 도와 주라는 것이다.
77년 입사 후 실제 정부는 종합상사법에 의거해 막대한 자금을 대기업에 지원하고 우선적으로 전 세계에 직원을 출장을 보내게 하였는데 나는 동남아 반에 들어가 난생처음 당시 일반여권이 원래없던 시절 상용여권을 급히 만드느라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를 방문한데는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방글라데시, 필리핀, 홍콩등으로 약 한달간 그 나라의 최고급 호텔에서 주최자가 되어 재벌들과 파티만 여는 강행군이었다. 아니 이게 꿈인가 파티가 끝난 그날밤 그들의 2차 초대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당시에 대기업은 공단이 생기기 시작하고 각종 산업에 문어발 확장을 시작할 때였는데 심지어 창원에서는 당시에 벌써 미국 General Dynamics 기술로 전차(戰車)를 맨 땅에서 막 착수하고 있는 공장에서 태평양에 날아가는 파리도 잡을 수 있으니 팔아보라고 하던 교육을 받을 때였다. 실제 이 한국형 K1 전차는 최근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발전하였다.
국가별 금융계와 재벌들 초대는 각 대사관에서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출장 비용은 박정희 정부에서 지원하였는데 당시 어려운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초호화 액수였다. 일견하면 단순하나마 우선 회사와 얼굴만 먼저 선전하라는 전무후무한 무역 외교였는데 다행히 나의 가창력과 회화는 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실제 그들이 찾아와 큰 배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많은 효과를 보기도 했다. 마치 장사를 군사 작전하듯 밀어 부치려 하지 않았나 후에 느꼈다. 유럽반에 의하면 회장님이 지폐를 들고 거북선 운운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고 하여 알았다.
그 후 정부는 더욱 체계적인 무역 법령과 전문 지식인을 대거 양성하기 위하여 1981년도부터 정식으로 각 대학에 무역학과를 신설하고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사들이 배출되었다.
나는 회사 방침에 따라 30대 중반 중동 건설 현장에서 팔자에 없는 중기 공장장을 3년을 마치고, 다시 종합상사로 복귀하였는데, 이후부터는 매주마다 국제 입찰에 매달려 출퇴근 없이 신경성을 앓을 정도로 노이로제에 걸린 적도 있다. 결국 나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987년 내 사업을 하기 위해 대기업을 떠났다. 무역은 이제 지겨워 당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자동차 정비업에 뛰어들려고 준비를 하였다. 내 나이 불혹(不惑)을 몇 해 지난 가을이었다.
사진은 수원에서 새마을 교육을 밤낮으로 7일간 받아 마지막날 최면에 걸려 삽자루를 들고 집에 오기도 하였으며, 또 하나는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같이 간 동남아 반 동료들과 파티를 여는 장면이다. 그리고 중동에서 중장비 정비 외 중기공장의 또 다른 작업인 콘크리트 레미콘 공장을 제사를 지내가면서 설치하는 장면이다. 어느 날 경기도 이천 근처 논에서 정부의 모내기 행사에도 동원되었는데 그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 전체 분위기는 밤 12시 통금에 일요일도 별로 기억에 없다. 참 벼라 별 세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국의 부흥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박정희라는 인물의 장기 독재가 없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제공한 장기저리 차관을 통한 경제 인프라 구축도 중요하였지만 이를 시행하는 데는 남북한 분단하에서 일관성 있는 강력한 추진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개인의 영달이라기보다 결국은 부부가 시해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말로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국가 운명적인 일이었다.
한국보다 잘 살았지만 역시 당시 같은 환경으로 미국과 일본의 경제 지원을 똑같이 받았던 필리핀은 끊임없는 정쟁으로 실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주와 독재 그리고 공산은 경제 논리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발도상 국가에서 벗어나는 게 급 선무라고 생각한다. 정치의 본질이다.
2개의 원자폭탄을 포함해 6년간 2차 대전으로 사망한 일본인 사망자수는 310만이다. 이에 버금해 한반도 해방 당시 2천만 인구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가장 무시무시한 3년 전쟁이 휩쓸고 300만 명이 죽어나간 남북한 전쟁직후의 시대는 정말 집한칸 없었고 헐벗었으며 살벌한 시대였다. 길거리에는 실제 걸인과 소매치기가 넘쳐 났으며 "조세형"이라는 도둑이 임꺽정 모양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명 인사였을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전쟁을 또다시 만나 전국토가 초토화 된다면 군인 아니라 어느 귀신이 또 나서도 백성은 별 말이 없을 것이다. 국가 재건은 그만큼 어려우며 운이 따라야 한다.
역사는 항상 지나간 500년에 비추어 재단하여야 한다. 특히 516이란 "I CAN DO" 정신의 탄력(彈力)은 새로 "神氣하게" 탄생한 한국이란 역사가 최초로 쏘아 올린 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굶주린 단말마적인 외침은 어떠한 정치적 논리에 의한 유불리로 될 수 없으며 그저 생존을 위한 생리적 현상일 뿐이다. 그 도전 정신은 오늘날의 젊은이에게도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앞으로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다. 일본의 홋카이도 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의 대한민국이 이제는 일본과 쌍벽을 이룰 정도가 되었으니 정말 하나님이 그리고 부처님이 보호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세기도 안돼 세계 무대에 오를 기적 같은 국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첨언한다면 지금의 대기업과 졸부들의 젊은 회장님들은 할아버지의 고생만 추모할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존재케 한 박정희의 작은 흉상이라도 사무실 한편에 모셔 놓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검소하고 근면한 그 정신을 잃어버려 망한 나라는 알젠틴과 이태리를 비롯해 과거 고대 유럽 국가에서도 무수히 많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516이 없었다고 가정하자. 지금의 한국은 청계천의 맑은 물도 없고, 믿기 싫겠지만 서울은 한산하고 지방은 동남 아시아의 어느 마을과 같으며 무엇보다 정쟁은 이조시대의 당파 싸움을 연상 시킬것이다. 혁신은 원래 백년이 가도 힘들다. 아니 지금의 유럽을 보면 오히려 퇴보해 가는게 현실이다. 한국은 5천년만에 장구한 역사후 출신 성분이 어떠하건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친 40대 초반의 젊은 박정희라는 인물에 의해 처음 이룬 것이다. 당시 중동에서는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근로자가 많았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해외에서 나마 유언처럼 염원한다.
05/2024
참새와 서생원(鼠生員)
한홍기 (64 국문)
참새와 쥐는 어울리지 않는 무리다. 하나는 공중에서 다른 하나는 지하에서 주로 활동을 하는데 이 놈들이 합동 작전으로 사람을 살려 화제가 되었다.
집사람은 꽃에 환장한 사람이다. 그 좁은 뒤뜰을 매해 봄부터 갈아엎으며 씨를 뿌리고 어린 꽃을 사다 심어 늦봄이 되면 벌써 울창하기 시작하더니 여름이면 천지를 덮는다. 그런데 작년에는 이에 추가해 이상한 습성을 하나 가졌다. 참새들이 오자 마당에 그 귀한 쌀을 뿌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며칠을 가려나 했더니 몇 마리가 내려와 쪼아 먹는 광경이 이뻐 보였는지 며칠이 아니라 이제는 전문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다.
봄철이 지나 여름이 되니 온갖 꽃들로 화려 무성한 좁은 뒤뜰이 새들과 함께 난리 법석이다. 꽃도 매일 열심히 가꾸지만 참새 밥도 삼시 세끼 다 해 먹인다. 아침이면 차고(車庫) 지붕이 덮일 정도로 새카맣게 앉아 쌀을 뿌리가 시작하면 이번에는 마당이 새카매진다. 하루 종일 점심과 저녁도 그러하니 뜯어말려도 막무가내다. 덕분에 나는 백 파운드짜리 무거운 쌀을 어깨에 지어 나르기 바빴다.
개중에는 왕관이 있는 빨간 멋진 새도 오지만 어느 때부터는 산비둘기와 다람쥐가 오기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저희들끼리 쟁탈전이다. 그러니 참새들은 차고 지붕으로 올라가 큰 놈들이 물러 날 때만 기다리기가 일쑤다. 그걸 보고 있을 집사람이 아니었다. 다람쥐를 쫒다 못해 어느 날 차고 지붕을 통해 무궁화나무로 내려오는 다람쥐를 신발짝으로 던졌는데 하필이면 정통으로 맞아 기절해 떨어졌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집사람 안절부절이다. 그 후부터는 그 다람쥐와 집사람은 신경전으로 한 해를 보냈다.
어느 날부터는 참새가 너무 많이 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점심 한 끼 만은 거르기 시작했다. 대신 저녁 시간은 철저해졌다. 온 동네 참새들에게는 이미 소문이 났지만 내 생각에는 이웃 위스콘신주까지 소문나 그곳서도 날라 오는 것만 같았다. 저녁 시간이 되면 4시 반부터 새들은 차고 지붕을 덮고 다람쥐는 무궁화나무에서 대기를 하는데 어느 날은 조금 늦어 정확히 5시를 넘으면 난리 구석이다. 나는 참새들에게 시간 개념이 이렇게 철저 한 줄 몰랐다. 우선 선발대가 고함을 치며 빈 마당에 내려왔다 올라가기를 몇 번 한 후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어떤 놈이 뒤뜰 통유리 문을 머리로 박아 쿵 소리에 테레비를 보다 놀라케 하더니 또 한놈은 가끔 나가떨어져 이거 잘못하면 폭동이 나겠다 싶어 얼른 집사람이 사발로 하늘에 뿌려대기 시작하면 한마디로 뒷마당은 가관이다.
원래 새 모이는 동네 규칙상 땅에 뿌리면 안 되고, 걸어놓은 모이통에 담아야 하지만 고리타분한 동양 고전(古典) 사상에 젖어 있는 집사람에게는 이게 통할 리가 없다. 닭모이 주듯 뿌려야 제맛이다.
그렇게 어느덧 가을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그 하얀 쌀을 보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태 없었던 진짜 쥐가 눈에 보여 이거 안 되겠다 싶었는데 그놈이 울타리 밑에 굴을 파기 시작했다. 집사람에게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로 또 신발짝을 던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그 구녕을 막는 것이 좋겠다고 현명한 판단을 한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늦게 흙을 잔뜩 갖다 놓고 구멍을 메꾸느라 힘을 쓰는데 왼쪽 가슴이 갑자기 간헐적으로 가끔 찌르듯 아파 중단을 했지만 그래도 구멍은 메꿨다. 며칠 후 교회 친교 시간에 사실 공표를 했더니 젊은 간호사가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으니 사진을 추천한다.
병원이라면 마다할 집사람이 아니어서 이튿날 당장 찍었더니 유방에 뭔가 비친다고 한다. 알 수 없으니 전문의를 찾아가라고 해 불안 안 마음을 붙들고 집사람과 같이 병원을 찾아 나섰다. 50대 중반의 여의사는 안경 너머 사진을 한참 보더니 갑자기 Good cancer!라고 외친다. 깜짝 놀라 Good cancer는 뭐고 Bad cancer는 뭔지 통 감이 안 와 집사람이 조심스럽게 Good은 뭐고 Bad는 뭐냐며 물으니 Good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지금 막 Cancer 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알고 병원에 왔냐고 되레 묻는다. 이래 저래 새하고 쥐새끼 하고 싸우다 왔다고 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우리들은 그놈들에게 감사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냥 모르고 3개월 후쯤에 왔으면 그게 자라 진짜 병으로 진입한다고 한다. 그런데 집사람은 어떻게 초기 단계에 씨를 잡았냐며 기적이라고 Miracle!!! 하고 외친다. 그러면서 그 씨를 제거 해야 하니까 이 건물 말고 다른 동네에 있는 병원도 같은 병원이니 거기서 수술하자고 헌다.
참! 우리는 둘이서 그 자리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놈의 신발짝이 왜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서생원께 괜한 못할 짓만 한 것 같았다. 내 어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랴 뒷마당을 찾아가 사죄하러 갔더니 신발짝에 하두 시달렸는지 언제부터인가 생원들이 모두 사라져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PS - 나는 솔직히 참새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7년 전 오리가 어디서 날라 왔는지 그 꽃밭에 느닷없이 알을 13개를 품고 부화를 시켜 그 새끼들을 죽어라 하고 4개월 동안 멸공봉사를 했는데 어느 날 모두 인사도 없이 날아가 한동안 하늘만 바라보는 허공증에 빠진 적이 있다. 그 후로는 새라고 하면 골프장에서 백조를 봐도 배신감이 떠 올라 외면을 하고는 했다.
(January 2024)
단체 카톡방 단상
김영언 (93 법학과)
올해 초, 대학 입학 30주년 홈커밍 행사가 공지된다. 가까운 친구들 제외하면 사실은 재학 중에도 친분이 없기 쉬웠던 법대 동기들 300명 중에 백수십명이, 앞에 나서준 친구들 덕분에, 단체카톡방으로 연결되었다. 30주년 행사의 숨겨진 진짜목적인 후원금 모집은, 애교심과 재력을 겸한 몇 동기들의 주도로 예상보다 쉽게 목표를 달성하였다. 오랜만에 연결된 친구들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라도 찾아보며 세월무상과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모습들에 꽤나 유쾌하였다. 앞으로 서로 소식 전하며 좋은 네트워크 만들자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반년 넘게 준비하며 시끌시끌하던 홈커밍행사가 갑자기 과거 일이 되었다. 난 게다가 그 방의 친구들 중에 유일한 재미교포이니 새롭게 만들어진 여러 오프라인 모임들은 먼산 밖의 일이다.
단체카톡방은, 이제 한국사람이면 모두가 경험하여 알듯이, 사실 십여명을 넘어가면 자칫하면 공해가 되기 쉽다. 사람이 진정한 우애를 나눌 벗의 크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도 잘 몰랐던 한 동기의 장모님 부고소식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 수십개가 달리며 나의 참여를 사실상 강제한다. 분위기 띄운다고 눈치 없는 친구 몇이 유머글을 띄우면, 친절한 벗 몇의 메아리가 잠시 들리다 다시 잦아든다.
이제 한국나이 오십. 어느 분야든 20여년의 노력과 행운이 모여, 전문가로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연배이다. 나름 이 나라의 명문대학에서 문과 최고학부 중 하나인 법학을 전공한 뒤 판사 검사 변호사 법조와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법무에서 중책을 맡은 동기들의 영전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여느 신문사에서 선정한 한국최고 법률전문가 리스트에 동기 이름이 실리면, 기사 링크는 이내 카톡방에 알려진다. 자랑스럽다는 격려와 축하가 며칠을 달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게 사람이다. 친구의 성공이 내 패배가 아니거늘, 나를 포함한 많은 인간은 모두 그 천형처럼 평생을 따라 다니는 질투심에서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모르는게 약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들어간 이 단톡방이, 앞으로 적어도 가끔은 내게, 굳이 경험할 필요 없었을 열등감을 선사할 것 같은 예감.
즉문즉설로 유명하신 법륜스님이나, 지난주 내게 설교하신 문목사님이,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성경과 신앙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세상에서 나와 내 이웃과 신을 사랑하면서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임을. 하지만 그래도 질투심이나 열등감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싶지는 않다. 당신을 닮게 그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신이 그토록 불같은 질투심을 성경 내내 보여주시는데 말이다. 사실 300명 동기 중에 절반 넘게 이 단톡방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시사하는 지점도 있다. 말이 길어지니 여기서 멈춘다. 인간은 모두 외롭고 불쌍하다.
같은 대학의 선후배로서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는 미중서부에 살고 있는 교우회의 36번째 회장으로 참여한 올해 송년회를 마쳤다. 동기 중에 극소수만이 선택한 이민의 길, 이력만리에서 열심히 달려 이제는 황혼을 바라보는 선배들의 모습에 마치 고향친척 어르신을 대하는 감정에 잠긴다. 유별난 애교심과 남다른 애국심에, 아직도 비교적 모임에 많이 참여하며 이민여정에 서로를 격려하는 사랑을 경험한다. 수십명이 같이 모인 시카고 교우회 단체카톡방은 부디, 무관심과 질투 보다는, 길어봐야 수십년 나그네길에 조금이라도 서로 손을 내밀며 정겨운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사랑방이 되기를 바래본다.
(December 20, 2023)
우리 세대가 더 행복한 건 아니다
도태환 (79 영문학과)
그해 10월 26일 이 후 이듬해 봄까지 캠퍼스 문은 닫혀 있었다. 5월 다시 문이 열린 대학들마다 축제를 준비 중일 때 나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요즘 한국 극장가에서 흥행을 몰아가고 있는 1980년‘서울의 봄’은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서울역 앞 대규모집결을 비롯한 전국적인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당시 신군부가 언론사에 주문한 표현을 빌리자면 ‘광주일원에 소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휴교. 과제물로 대체한 봄학기와 긴 여름방학이 이어지고 있었다.
신군부는 대학가에 다시 시위가 발생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월에 다시 개방된 대학들이 모두 숨죽이던 그때 고려대에서만 전두환을 몰아내자는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재개됐다. 추석을 며칠 앞둔 날 ‘고려대 휴교’ 위수령이 떨어졌다. 이어서 고려대 폐교가 검토 중이라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얼마나 심각했는지 수많은 교우들이 나서서 폐교 만은 안된다고신군부에 사정을 했다고 한다. 잠시 스쳐가는 일개 쿠데타 세력이 민족의 힘으로 세운 최고의 사학을 없애겠다는 발상이 말도 안된다고 할 지 모르켔으나 ‘고대 폐교’는 한동안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1979년 말부터 1980년의 대부분을 캠퍼스 밖에서 보내야 했으나 등록금은 군말 없이 꼬박 내야 했다. 제자들이 독재에 항거하여 교문 밖으로 무리지어 나아갈 때 마흔을 갓 넘긴 교수는 석탑 안에서 이를 내려보면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고 썼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로 시작하는 4.18 기념탑 명문을 쓴 이,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민족의 보람찬 대학’으로 시작하는 호상비문을 쓰고 고려대학교 교가를 작사한 조지훈 교수는 1960년 4월 혁명을 눈물로 지켜보았다. 최근에 안 일이지만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린 그 글도 십 수년 전 시비로 제작되어 문과대 뒤편에 터를 잡았다.
유신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70년대 초 학번의 교우들은 돌로 시위 진압대와 맞섰던 기억을 들려준다. 중앙도서관을 막 짓기 시작한 때여서 건축용 자갈이 수북했었다고 회상했다.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는 일이 흔했으니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이 공포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1987년 전두환의 대통령 간선제 호헌 선언 철폐를 끌어낸 민주화 시위는 당시 학번 교우들에겐 시위 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들이 현재의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을 주는 것 같다. 넥타이부대의 동참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 넥타이 부대의 구성원들이 바로 70년대 말, 80년대 초 학번 출신이라는 분석을 은근히 끼워 넣어보지만 자부심은 꿈쩍 않는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쟁, 자유당 독재 등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세대들에게 조지훈 교수는 당신들 세대만이 더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1960년대에는 세대 마다 각자의 세대가 가장 불행한 시절을 겪었다고 다투듯 논쟁을 했던 것 같다. 3, 4개의 공화국을 거치면서 독재가 이루어 지다 보니 민주화 운동도 논쟁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더 격렬했고 우리가 더 힘들었다는 식의 세대간 주장이 나온다. 이만큼 잘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 하는 이도 있다. 세상 좋아졌다고 하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만 듣는 게 아니다. 단언하건대 어느 세대든 앞 세대로부터 들어 왔을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자면 ‘라떼’는 항상 있었다. 과거 세대가 불행했다면 지금 세대는 행복한가. 앞 세대 덕분에 세상이 좋아졌다니 다음 세대가 말할 기회는 널려 있다.
사실 두서 없는 위의 글들은 젊은 교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미끼다. 새로 미중서부 교우회 회장이 된 김영언 교우의 은근한 희망사항이기도 한데 동감이다. 안암발 미중서부착 광역 스펙트럼을 담게될 새 홈페이지를 그래서 기대한다.
(December 2023)
창간 격려사
한홍기 (64 국문학과)
고려대학교 미중서부 교우회가 창립된지 어느덧 50여년이 되었습니다. 한인 이민의 역사와 함께 미국에서 또 하나의 고려대학교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중서부 교우회의 홈 페이지가 창간 되었음을 축하합니다. 디지탈 세상에 오히려 늦은 감도 있지만 많은 교우회원들의 사랑을 받을것으로 확신합니다. 20년전 제가 "News Letter"를 분기마다 지면으로 발행해 각 가정에 우편으로 송부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러한 공동 코뮤니티는 교우님 개개인의 동참이 없으면 유명무실해지기 쉬우므로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고려대학교라는 선후배간의 독특한 협동심과 안암골 호랑이의 기상은 이러한 홈페이지를 통해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의 대하 드라마가 시작되는 또 하나의 미국판 미중서부 팔만대장경을 다같이 써 내려가기 바라며, 또한 미중서부를 떠나 타주에 거주하시거나 한국에서 활동중인 많은 교우님들도 정들었던 미중서부 고향에 지속적인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김영언 회장님과 임원진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와 치하를 드립니다.
(November 2023)